[굿모닝충청 이호영 기자] #1. 백제를 침공하기 위해 660년 5월 26일 경주를 출발한 5만 신라군은 백제의 수도 부여를 지나쳐 6월 18일 경기도 이천까지 기동했다. 왜 그랬을까?
#2. 소정방은 660년 6월 18일 13만 대군과 1900척의 전선을 이끌고 중국의 산동반도를 출발해 21일 인천 덕물도에 도착했다. 3일간 총 310㎞를 항해했다. 이후 소정방은 백제 수도 부여에 7월 10일 도착했다. 덕물도에서 부여까지는 205㎞, 3일이면 충분한 거리를 20일간 항해한 것이다.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3. 계백장군의 5000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싸우고 있을 때 나머지 백제군사는 다 어디에 있었을까?
영남대 한국군사문제연구소 이재준 박사. 1982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중부전선 DMZ작전과 강릉무장공비작전을 수행하고, 연대장과 여단장을 지낸 뒤 최근 전역한 육군 대령의 눈에는 660년 백제가 멸망할 당시 마지막 전투에 미스테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당시 당군의 편제나 규모, 동선은 현재의 군 기동과 보급능력으로도 보더라도 불가능에 가깝다. 역사적 기록 외에 숨겨진 이야기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 이 박사의 분석이다.
백제의 마지막 전쟁에 대한 군사학적 연구는 이렇게 시작됐고, 이 박사는 그 결과를 지난 6월 ‘백제멸망과 부흥전쟁사’(경인문화사)를 통해 공개했다.
“전해지는 사료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당군은 당진에 상륙해 면천 백제수군창고를 공격해 부족한 식량을 탈취하고, 예산 대술면과 공주 탑곡리까지 허위기동을 하고 돌아갔다. 약 10일이 걸렸다. 이후 당군은 배를 이용해 당진에서 보령으로 이동해 미조포에 상륙한 뒤 미산면과 청양군 대치면까지 조공부대를 투입했다. 그런 후에야 기벌포라고 하는 서천과 군산지역을 공격했는데, 이는 주력부대인 소정방이 금강을 통해 부여로 진격하기 위한 진입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견부확보작전이었다. 일정상으로 7월 7~8일 경이다.”
이 책에 따르면 백제는 당군의 기동을 막기 위해 6만 명의 군사 중 3만 명을 예산·당진 방면으로 투입시키고, 나머지 2만 5000명을 왕성 수비에 남겨뒀으며, 나머지 5000명으로 계백장군으로 하여금 신라군을 막게 했다. 이 작전의 실패로 결국 백제는 패망을 겪게 됐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이 책은 소정방이 7월 9일 상륙했다는 기벌포와 웅진강구가 어디이고, 김유신은 계백의 5000 결사대와 4번이나 싸워 왜 다 졌는지, 강대했던 백제가 전투개시 10일 만에 항복한 이유는 무엇이고, 나당연합군 1만 7000명이 주둔했던 웅진도독부가 공주로 보는 것이 타당한지 등에 대해 고증을 통한 해답을 제시했다. 그동안 학계에서 논란이 됐던 부분들을 말끔히 해소한 것이다.
이 박사는 “그동안 백제 멸망과 부흥전쟁에 대한 연구는 1910년대 일본학자들에 의해 연구된 결과를 그대로 답습하는데 머물러 있었다”며 “철저한 사료분석을 기초로 전쟁의 본질과 전장상황을 고려한 실증적 접근을 통해 왜곡된 역사를 이제라도 바로잡는데 이 책이 소중한 자료로 쓰이길 바란다”고 말했다.